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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성 언론이 가진 성역의 붕괴
1. 서론 과거 인쇄 매체 시절, 언론은 ‘역사의 초고’를 기록한다는 명분 아래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려왔다. 그러나 2026년 현재, 대한민국 언론은 기술적 진보를 거부한 채 자신들이...
2026. 05. 04.
2026. 05. 04. 조회수 표시생략
데이터화된 인간: 왜 시장은 신입의 가능성을 거부하는가
과거의 기업은 신입을 뽑아 조직의 일원으로 길러내는 ‘교육’의 과정을 투자로 여겼다. 하지만 AI 기술의 등장은 이 투자 공식을 철저히 파괴했다. 방대한 데이터를 단숨에 학습하고 결과물을...
2026. 04.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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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어떤 비밀도 없다 : 데이터 시대의 자기 증명
4차 산업혁명이 대두되고 있는 21세기는 데이터가 난무하는 시대이다. 내가 궁금한 것, 먹고 싶은 것, 관심 있는 분야부터 진로와 가족 관계에 이르기까지, 원하는 거의 모든 정보가...
2026. 04.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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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러다임의 몰락과 언론 혁명
어떤 시대건 정보의 유통권을 쥔 자가 세상을 지배해 왔다. 미디어가 거대 자본과 권력의 전유물이었던 시대에 성벽 안에서 생산된 정보는 반증 불가능한 ‘정답’으로 군림했다. 21세기 디지털...
2026. 04.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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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성을 갖춘 ‘독립 언론’이 있어야 할 이유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보급되기 전, 미디어는 거대 자본과 권력을 가진 특정 집단의 전유물이었다. 종이 신문 한 부가 독자의 손에 쥐어지기까지는 수억 원의 자본과 수많은 인력이 필요했다....
2026. 04. 20.
2026. 04. 20. 조회수 표시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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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성 언론이 가진 성역의 붕괴

1. 서론

과거 인쇄 매체 시절, 언론은 ‘역사의 초고’를 기록한다는 명분 아래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려왔다. 그러나 2026년 현재, 대한민국 언론은 기술적 진보를 거부한 채 자신들이 세운 낡은 성벽 안에서 자아도취에 빠져 있다. 특히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로 대표되는 거대 언론 권력은 스스로를 오류가 없는 신적 존재로 격상시키며, 대중 위에 군림하려는 태도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 본 보고서는 이러한 기만적 권위를 근거를 파헤치고 그 종말을 선언하고자 한다.

2. ‘원판 불변의 법칙’이라는 지적 태만

디지털 신문은 수정과 보완이 자유로운 유연한 매체임에도 불구하고, 언론계는 여전히 ‘한번 올라간 기사는 고칠 수 없다’는 해괴하면서도, 역겨운 원칙을 고수한다.

이 원칙은 두 가지 모순된 점을 지닌다. 첫 번째는 기술적 모순으로, 실시간으로 정보가 교정되는 초연결 시대에 ‘종이 신문’이 지니는 물리적 한계를 디지털 환경에 강요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이는 전통의 고수가 아니라, 잘못을 바로잡기 귀찮아하는 ‘지적 나태함’의 발로이다. 두 번째 오보의 방치로, 명백한 사실관계 오류를 확인하고조 “기록의 보존”을 핑계로 이를 방치하는 행위는 독자에게 독이 든 정보를 먹이는 것과 같다. 이들에게 “역사”는 진실의 기록이 아니라, 자신들의 실수를 덮기 위한 ‘방패’로 전락한다.

3. 인색한 정정보도, 도둑 수정이라는 비겁함

한국 언론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들이 틀렸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실수를 인정하는 순간, 저널리즘의 완성이 아니라 패배의 낙인으로 인식된다.

오보는 대문짝만하게, 정정보도는 보이지 않는 구석에 배치하는 비겁함은 이미 고질병이다. 1,000만 명에게 독을 퍼뜨리고, 고작 수백 명에게만 해독제를 건네는 행태는 범죄에 가깝다. 또한 아무런 공지 없이 슬그머니 문구를 바꾸는 행위는 독자의 기억을 조작하려는 오만함이다. 투명한 수정 로그(Update Log)가 없는 기사는 더 이상 신뢰할 수 있는 정보가 아닌, ‘언제든 말이 바뀔 수 있는 찌라시’에 불과하다.

4. 삐뚤어진 엘리트 의식과 ‘개돼지 담론’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기자들의 내면에 깊게 뿌리박힌 ‘선민의식’에 있다. 그들은 자신들을 대중을 계몽하고 이끌어야 할 엘리트로 착각하며, 독자를 정보를 수동적으로 소비하는 ‘개돼지’로 여긴다. 즉, “우리는 진리를 말하니 너희는 듣기만 하라”는 고압적 태도를 보이며 대중과의 괴리를 키우며 이들의 펜 끝에는 진실에 대한 고찰보다,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를 확인받으려는 욕망이 더 짙게 배어 있다. 아울러, 정파적 이익을 위해 팩트를 조작하고, 대중의 감정을 자극하여 여론을 조작하려는 행태는 저널리즘이 아니라 ‘정치적 선동’이다.

5. 직업적 해체: ‘기자’에서 ‘AI 대체 가능 노동자’로 전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고집과 독자를 무시하는 오만함이 결합된 현재의 ‘인간 기자’들은 존재 가치를 상실한다. 이에 우리는 ‘기자’라는 직업의 해체를 제안한다. 왜냐하면 조·중·동을 비롯한 기득권 매체들은 더 이상 언론이라 불릴 자격이 없다. 그들은 정보를 가공하여 권력을 창출하는 이익 대변 공장일 뿐이며, 그곳에 속한 종사자들 역시 저널리스트가 아닌 프로파간다 기술자로 재정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인간 기자를 전부 해고하고 그 빈자리에 AI가 들어와야 한다. AI는 인간처럼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오류가 있다면 즉각 수정하고, 선민의식 없이 데이터에만 충실하기 때문에 오히려 공정하다. 사과할 줄 모르는 인간 기자보다는, 알고리즘에 따라 투명하게 업데이트되는 AI가 사회적 신뢰 회복에 훨씬 유익하다.

6. 결론

우리는 오늘부로 한국 언론에 무상으로 대여했던 신뢰라는 이름의 권위를 전면 회수한다. 수정되지 않는 기사는 권위가 아니라 오점이며 사과하지 않는 기자는 지식인이 아니라 기술자일 뿐이다. 이제 대중은 더 이상 그들의 가르침을 기다리지 않는다. 스스로를 업데이트하지 못하는 존재는 도태되는 것이 자연의 섭리다. 오만한 인간 기자가 떠난 자리를 투명한 데이터와 정직한 시민들의 목소리가 채울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바라는 진정한 저널리즘의 회복이자, 낡은 권력에 대한 최후통첩이다.

데이터화된 인간: 왜 시장은 신입의 가능성을 거부하는가

과거의 기업은 신입을 뽑아 조직의 일원으로 길러내는 ‘교육’의 과정을 투자로 여겼다. 하지만 AI 기술의 등장은 이 투자 공식을 철저히 파괴했다. 방대한 데이터를 단숨에 학습하고 결과물을 내놓는 AI와 비교할 때, 인간 신입 사원을 교육하여 전문성을 갖추게 하는 데 드는 시간과 비용은 기업 입장에서 ‘비효율적인 손실’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제 기업은 가설(가능성)을 검증하기보다, 이미 검증된 결과값(경력)을 구매하는 방식을 택하려 한다.

많은 동기부여 영상에서는 여전히 “잠을 줄이고 죽을 만큼 노력하라”고 외치고 있다. 하지만 AI 시대에 단순한 노력과 암기, 정해진 매뉴얼을 숙지하는 노동은 더 이상 가치를 창출하지 못한다. 신입이 밤을 새워 정리할 자료를 AI는 1초 만에 완수한다. 결국 시장이 경력직을 선호하는 이유는 그들이 가진 ‘지식’ 때문이 아니라, 수많은 시행착오를 통해 쌓인 ‘상황 판단력’과 ‘맥락을 읽는 직관’ 때문이다. 이는 AI가 단기간에 흉내낼 수 없는, 오직 실전 데이터로만 증명되는 경력직만의 독점적 자산이다.

이제 시장은 “가르쳐주면 잘하겠다”는 신입의 태도를 무지성으로 규정한다. 4차 산업혁명의 파고 속에서 기업은 항해법을 가르쳐줄 여유가 없다. 이미 거친 파도를 넘어본 경험이 있는 사수, 즉 자기만의 ‘시스템’과 ‘포트폴리오’를 데이터로 입증할 수 있는 사람만을 원하고 있닫. 신입이라는 단어가 가진 ‘배움의 특권’은 사라지고, 오직 ‘준비된 자’만이 생존할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앞서 언급된 고전적인 동기부여 방식―친구를 끊고, 잠을 설쳐가며 혼자 고립되어 공부하는 방식―은 ‘정답이 정해진 시험’에는 유효할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취업 시장은 시험장이 아닌 ‘설계장’으로, 기업이 경력직을 선호한다는 것은, 단순히 일을 잘하는 사람을 뽑겠다는 뜻을 넘어, “혼란스러운 데이터 속에서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줄 아는 사람”을 찾겠다는 선언이다. 맹목적인 노력만으로 무장한 신입은 문제를 해결할 줄 아는 경력직의 노련함을 이길 수 없다.

그러나 시장이 경력직을 선호한다고 하여 신입의 길이 완전히 막힌 것은 아니다. 다만, 신입이라는 이름 뒤에 숨어 가능성만을 담보로 구걸하던 시대가 끝났음을 인정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스스로를 신입의 몸을 한 경력직으로 재설계해야 한다. 학교나 기관이 가르쳐주길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AI와 뉴미디어를 도구 삼아 자신만의 전문성 데이터를 축적해야 한다.

시장의 냉혹한 경력직 선호 현상은 우리에게 경종을 울리고 있다. “당신의 노력이 단지 고통스러운 인내에 머물고 있는가, 아니면 시장이 즉시 구매할 수 있는 가치 있는 시스템으로 변환되고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자만이, 문턱이 사라진 시대의 진정한 주인공이 될 것이다.

무지성한 고통은 위로받을 수 있을지언정, 고도화된 AI 시대의 시장에서 선택받을 수 없다. 오직 논리적으로 체계화된 자신만의 ‘경력’만이 당신의 실존을 증명할 것이다.

세상은 어떤 비밀도 없다 : 데이터 시대의 자기 증명

4차 산업혁명이 대두되고 있는 21세기는 데이터가 난무하는 시대이다. 내가 궁금한 것, 먹고 싶은 것, 관심 있는 분야부터 진로와 가족 관계에 이르기까지, 원하는 거의 모든 정보가 클릭 몇 번이면 눈 앞에 펼쳐지는 세상이 되었다. 이제 정보는 단순히 아는 것을 넘어, 한 개인과 기업의 실체를 규명하는 가장 강력한 척도가 되었다.

나는 수년 전 포털 인물 검색에 나의 정보를 공식적으로 등재했다. 처음 등록을 결심했을 때는 망설임이 컸다. 나의 내밀한 신상 정보가 제3자에게 가감없이 공개되는 것이 보안이나 사생활 측면에서 위험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때문이었다. 그러나 사업을 운영하고 활발한 사회 활동을 이어가는 과정에서 뼈아픈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현대 사회에서 ‘정보가 없다’는 것은 곧 ‘실체가 불분명하다’는 불신으로 직결된다는 점이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지점이 있다. 나의 이러한 행보가 단순히 타인의 시선을 즐기는 ‘셀럽 놀이’나 유명해지고 싶다는 개인적인 노출 욕구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불특정 다수에게 나를 전시하는 것은 심리적으로 몹시 피로하고 부담스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보를 등재한 이유는, 공적인 영역에서 활동하는 창업가로서 타인에게 ‘신뢰의 근거’를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검증되지 않은 정보가 범람하는 시대에, 자신의 이력을 투명하게 공개하는 것은 일종의 ‘자기 검증’이자 사회적 책임이다. 나는 내가 누구이며, 어떤 길을 걸어왔고, 무엇을 지향하는지를 공식적인 데이터로 증명함으로써 비즈니스의 투명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나의 신상을 등재하는 행위는 화려한 조명을 받기 위함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안심하고 협력할 수 있는 ‘신용의 지도’를 건네는 과정이었던 셈이다.

처음 하는 과정이다 보니 키나 혈액형처럼 현재의 전문성과는 거리가 있는 과한 정보까지 입력하기도 했지만, 그 사소한 수치들조차 이제는 ‘나’라는 사람을 설명하는 공식적인 데이터 조각이 되었다. 결과는 예상보다 훨씬 신속하게 통보되었고, 검색창에 내 이름이 등재된 것을 보며 나는 묘한 무게감을 느꼈다.

이제 세상에 어떤 비밀도 없다. 과거의 비밀이 은밀한 사생활이었다면, 오늘날의 비밀은 공개되지 않아 발생하는 ‘사회적 불확실성’을 의미한다. 투명하게 나를 드러내고 그 데이터에 책임을 지는 태도, 그것이야 말로 데이터의 바다를 항해하는 현대인이 갖춰야 할 진정한 전문성의 시작이다.

패러다임의 몰락과 언론 혁명

어떤 시대건 정보의 유통권을 쥔 자가 세상을 지배해 왔다. 미디어가 거대 자본과 권력의 전유물이었던 시대에 성벽 안에서 생산된 정보는 반증 불가능한 ‘정답’으로 군림했다. 21세기 디지털 혁명이 그 요새의 문을 열어젖혔음에도 불구하고, 대중은 여전히 플라톤이 경고했던 ‘동굴’ 안에 머물러 있다. 거대 미디어와 포털이 투사하는 왜곡된 그림자를 진실이라 믿으며, 그 너머에 존재하는 ‘태양’의 빛을 망각한 채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2024년 12월 3일, 그 동굴의 벽면이 처참하게 무너지는 광경을 목격했다. 윤석열의 내란 선포와 긴박했던 진압의 과정 속에서 전통적인 재래식 언론의 속보의 속도와 현장의 진실을 담아내는 데 있어 처절할 정도로 무력했다. 오히려 동굴 밖의 빛을 먼저 비춘 것은 실시간으로 현장을 중계하던 유튜브 방송과 뉴미디어의 기동성이었다. 서부지방법원을 둘러싼 폭동과 그 비극적인 진압의 현장에서도 기성 언론은 시스템의 눈치를 보며 머뭇거렸으나, 대중의 눈은 이미 그들의 필터를 거치지 않은 가공되지 않은 진실을 갈구하고 있었다.

플라톤은 그의 저서 《국가》에서 “정치를 외면한 가장 큰 대가는 가장 저질스러운 자들에게 지배당하는 것”이라고 일갈했다. 이 준엄한 경고는 오늘날의 언론 지형에도 그대로 투영된다. 진실에 대한 추구를 외면하고 기성 시스템의 안락함에 안주한 대가는 결국 자극적인 수익 구조에 매몰된 혐오 비즈니스와 낡은 이념 논쟁에 사로잡힌 저질스러운 정보들에 경도되는 현실로 돌아왔다.

토마스 쿤(Thomas Kuhn)의 관점에서 볼 때, 현재의 미디어 생태계는 구체제의 모순이 임계점에 도달한 상태다. 12.3 내란 사태에서 여실히 드러난 기성 매체의 한계는, 그들이 신봉해온 ‘기계적 중립’이라는 패러다임이 더 이상 진실을 담아낼 수 없음을 알리는 명백한 전조였다.

내란이라는 국가적 비상사태 앞에서도 기성 언론은 누가 선(善)이고 무엇이 정의(正義)인지 가려내기보다, 양측의 주장을 기계적으로 나열하며 ‘객관성’이라는 방패 뒤로 숨어버렸다. 이러한 기게적 중립은 진실을 밝히는 도구가 아니라, 사실상 불의에 눈감는 비겁한 면죄부로 전락했다. 쿤의 이론에 따르면, 기존 패러다임이 해결하지 못하는 ‘변칙 사례(Anomaly)’들이 누적될 때 혁명은 시작된다. 내란의 현장에서 선동과 진실을 구분하지 못하고 양비론에 매몰된 기성 매체의 무력함이야말로, 그들이 수호해온 저널리즘의 패러다임이 수명을 다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이다.

동굴 안의 그림자 놀이와 같은 기계적 중립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독립 언론의 실존 자체가, 이 낡은 패러다임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언론 지평을 여는 혁명의 시작이다. 우리는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매개자가 아니라, 붕괴한 구체제의 파편 위에서 무엇이 진실인지를 명확히 규정하는 새로운 저널리즘의 설계자가 되어야 한다.

나는 거대 자본이 지배하는 언론이 만들어 낸 그 거대한 오만 앞에서 단순한 저항을 넘어선 대안을 결심했다. 나를 배제했던 그들의 낡은 문법에 매달리는 대신, 독립적이고 전문적인 ‘우리’의 시스템을 직접 설계하기로 한 것이다. 플라톤이 말한 ‘태양’은 선(善)의 이데아이자 만물의 근원이다 나는 그 빛을 가로막는 동굴의 벽을 허물고, 누구나 직접 태양을 마주할 수 있는 새로운 정보 전달 체계를 구축하려 한다. 이것은 감정적 대응이 아니라, 부조리한 패러다임이 해결하지 못하는 진실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구조적 접근이다.

이제 나는 시스템으로 증명한다. 동굴 안에서 그림자의 길이를 재는 행위가 언론인가, 아니면 동굴 밖의 빛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진실을 직조해 내는 설계가 언론인가. 기성 세력이 저질스러운 정쟁에 함몰되어 있을 때, 나는 우리가 설계한 독립적 시스템 위에서 시대의 통증을 가장 정교하게 기록할 것이다.

편견은 설계도가 되었고, 배제는 시스템의 동력이 되었다. 오만에는 더 큰 오만으로 맞서겠다. 다만 그 오만이 한낱 객기가 아닌 합당한 도전이라는 점을, 오직 실력과 전문성으로 끊임없이 입증해 내는 것만이 내게 주어진 마지막 과제이다.

전문성을 갖춘 ‘독립 언론’이 있어야 할 이유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보급되기 전, 미디어는 거대 자본과 권력을 가진 특정 집단의 전유물이었다. 종이 신문 한 부가 독자의 손에 쥐어지기까지는 수억 원의 자본과 수많은 인력이 필요했다. 정보는 높은 성벽 안에서만 생산되었고, 대중은 그저 성 밖에서 주는 정보를 받아먹을 뿐이었다. 그러나 21세기, 인터넷의 발명은 이 견고한 성벽을 무너뜨렸다. 초창기에는 모니터로 기사를 읽는다는 것이 생소했지만, 이제는 누구나 손안의 기기로 세상을 읽고 스스로 기사를 발행한다. 발행 비용은 현저히 낮아졌고, 언론의 문턱은 마침내 평등해진 듯 보였다.

문턱은 낮아졌으나 대중의 시선은 여전히 거대한 산맥을 향한다. 영국의 BBC처럼 한국의 KBS, 그리고 MBC와 SBS로 대표되는 지상파 방송사는 여전히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유선 방송의 메인 채널을 점령한 이들의 목소리는 곧 여론이 되고 상식이 된다. 하지만 그 영향력의 크기만큼이나 공영 방송이 짊어진 그림자도 짙다. 거대 조직을 유지하기 위한 자본의 논리,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반복되는 정치적 간섭은 그들의 펜 끝은 무디게 만든다. 거대 언론이 시스템의 눈치를 보느라 침묵할 때, 소외된 진실은 그 거대함 속에 매몰되곤 한다.

내가 직접 독립 언론의 기치를 들고 현장에 나섰을 때, 나를 맞이한 것은 환대가 아닌 차가운 냉소였다. 세상은 낮은 문턱을 통해 들어온 새로운 목소리를 각자의 선입견이라는 잣대로 재단하며 날 선 질문들을 던졌다.

“수완뉴스, 거기 광주광역시 신문이야? 왜 수완이야?

이름이 주는 낯섦을 지역적 한계로 가두려는 시선. ‘수완(水完)’이 지향하는 가치보다 행정 구역의 명칭으로 먼저 치부해버리는 단편한 사고 방식.

“청소년 언론? 애들 소꿉장난 아니야?”

나이가 전문성을 결정한다는 고루한 편견. 기사의 질보다 기자의 생물학적 나이를 먼저 묻고, “학생이 공부나 하지 무슨 기사를 쓰느냐”며 가르치려 드는 권위주의적 냉소.

“포털과 제휴 안되어 있으면 취재를 허가할 수 없습니다.”

거대 IT 플랫폼의 승인이 언론의 면허증이 되어버린 기형적 구조. 포털이라는 성벽 안에 들어가지 못한 언론은 진실을 말할 기회조차 박탈당하는 제도적 장벽.

이 알 수 없는 야유와 보이지 않는 벽들 앞에서 나는 매 순간 스스로에게 물어야 했다. ‘나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비난들이 나를 깨웠다. 칼 포퍼(Karl Popper)의 반증주의에 따르면, 어떤 이론이 과학적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반증의 시도를 견뎌내야 한다. 기성 언론이 구축한 ‘포털 제휴가 곧 언론의 자격’이라거나 ‘나이가 전문성을 결정한다’는 명제들은, 사실 진리가 아니라 단지 반증되지 않았기에 유지되어 온 견고한 독단일 뿐이었다. 나의 취재 현장은 그 거대한 오만에 던지는 하나의 ‘반증 사례’였다.

또한, 토마스 쿤(Thomas Kuhn)이 말한 패러다임 전환의 관점에서 볼 때, 현재의 미디어 생태계는 구체제의 모순이 임계점에 도달한 상태다. 거대 공영 방송과 포털 중심의 주류 패러다임이 해결하지 못하는 사각지대, 즉 ‘변칙 사례(Anomaly)’들이 도처에서 발견되고 있다. 사람들의 냉소와 비난은 오히려 기존 패러다임이 수명을 다했음을 알리는 전조이자, 새로운 언론의 시대가 도래해야 함을 증명하는 강력한 근거였다. 기성 매체의 문법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수완뉴스’의 존재 자체가, 곧 낡은 패러다임을 무너뜨리는 새로운 언론 지평을 여는 과학적 혁명의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나를 무시했던 그 모든 차가운 시선 앞에 당당히 묻는다. 포털의 성벽 안에서 보도자료를 베껴 쓰는 것이 언론인가, 아니면 거부당한 현장에서 끝내 진실을 건져 올리는 것이 언론인가. ‘애들 장난’이라며 나의 펜을 비웃던 이들이 낡은 이념 논쟁에 매몰되어 있을 때, 나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시대의 통증을 기록해 왔다.

나의 독립 언론은 단순히 하나의 채널이 아니다. 그것은 거대 미디어가 안주해온 썩은 토대를 뒤흔드는 경종이다. 제도권의 허락 따위는 피료 없다. 취재 허가권이라는 완장을 차고 진실을 검열하는 이들에게, 그리고 무리로 있지 않으면 목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비겁한 권위주의자들에게 나는 나의 ‘전문성’으로 응답할 것이다.

야유는 확신이 되었고, 비난은 동력이 되었다. 나는 앞으로도 기성 언론이 닿지 못하는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날카로운 문장으로 세상을 깨울 것이다. 오만과 편견으로 가득 찬 세상을 향해 멈추지 않고 타종하는 것. 그것이 내가 이 길을 걷는 이유이며, 수완뉴스가 증명해낼 유일한 실존의 가치이다.